간이식 위해 1만 킬로미터 날아온 페루계 美 자선사업가 한국서 새 생명

장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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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 의사가 한국에 있고 선택지는 한국뿐’ 생체간이식 위해 한국행 결심 서울아산병원 간이식팀, 딸의 간 우엽 안전히 절제해 아버지에게 성공적 이식 지방간이 간경화로 진행… 폐에 물 차 숨쉬기 힘들고 신장까지 망가질 위험

일평생 조국 페루의 소외된 계층에게 봉사하며 살아오던 중 간경화로 목숨을 담보하지 못할 상황에 놓인 미국인 자선사업가가 머나먼 한국 땅에서 간이식을 받고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다.

서울아산병원 장기이식센터 간이식팀은 간경화를 앓던 마르코 안토니오 키로스(69세, 남) 씨에게 딸 킴벌리 루시아 키로스(30세, 여) 씨의 간 일부를 이식하는 생체간이식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마르코 씨 부녀는 수술 후 순조롭게 회복해 최근 퇴원했으며 내일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마르코 씨는 미국과 페루를 오가며 부동산 건설 사업과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쳐왔다. 부동산 건설 사업으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양로원 노인이나 저소득층 가정, 투병 중인 환아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 물품과 금전적 후원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지난 2008년 페루에서 담낭(쓸개)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해당 수술을 마친 의사는 생각지도 못한 지방간 소견을 전했다. 의사는 마르코 씨가 음주는 물론 흡연도 하지 않는 점을 고려해 유전적 소인인 것 같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후 검사 결과지를 갖고 미국의 주치의에게도 자문을 구한 결과,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해 별다른 치료 없이 넘어갔다.

그렇게 부동산 건설과 자선사업에 몰두하며 십여 년이 흘렀고, 2025년 9월경 마르코 씨는 배가 계속 불러오는 느낌에 페루 병원을 찾았다. 배에 물이 차는 복수 증상이었다. 그리고 지방간은 어느새 간섬유화로 진행되어 있었다. 숨쉬기가 조금 힘들어지기 시작한 올해 2월, 다시 병원에 갔을 때는 복수가 심해지고 폐에도 체액이 축적된 상태였으며, 간 조직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간경화 소견까지 들었다.

간이식 말고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신장까지 망가질 위험이 컸다. 문제는 페루에서는 간이식이 가능한 나이가 65세까지로 제한돼 있어 69세인 마르코 씨는 수술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이었다. 미국에서는 수술은 가능하나 뇌사자간이식 대기자 명단에 오를 뿐 1년 이상의 기약 없는 기다림을 마주해야 했다. 누군가가 생명을 다해야만 이식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마르코 씨를 고통스럽게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직접 검색에 나선 마르코 씨는 생체간이식 수술법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정보를 깊게 찾아가다 보니 생체간이식을 안전하게 시행하는 나라와 병원이 하나둘 추려졌고 최종적으로 남은 곳은 단 하나, 한국의 서울아산병원이었다.

서울아산병원은 1992년 간이식을 처음 시행한 이후 2025년 초 단일 의료기관으로는 세계 첫 간이식 9,000례를 달성했으며, 연간 수술 증례도 500례에 달했다. 특히 생체간이식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서울아산병원은 생체간이식만 연간 400례를 하며 기증자 간 사망률 0%의 세계 최고 수준의 간이식센터였다.

마르코 씨는 ‘최고의 의사들이 한국에 있고 선택지는 무조건 한국뿐이다’라는 확신을 얻고 5월 말 가족들과 함께 1만 킬로미터를 날아 낯선 땅 한국에 도착했다. 5월 28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첫 진료를 받은 마르코 씨는 이후 자녀들과 함께 병원에 입원해 수술 전 필요한 일련의 검사들을 진행했다.

검사 결과 최종적으로 딸이 아버지에게 간을 기증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의료진은 딸의 강한 기증 의사는 물론 체격 조건과 건강 상태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아버지에게 필요한 간 용적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8월 14일(금) 오전 8시 두 개의 수술실에 불이 켜졌고 부녀는 나란히 수술대에 올랐다. 딸 킴벌리 씨의 기증자 간절제 수술은 간이식·간담도외과 송기원 교수가 맡았다. 의료진은 킴벌리 씨의 간 우엽을 복부에 10㎝ 미만 작은 절개만 내는 최소 절개 기법으로 진행해 흉터와 합병증 발생을 최소화했다.

이어 간이식·간담도외과 이승규 석좌교수와 문덕복 교수가 마르코 씨의 간이식 수술을 집도했다. 환자 간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간 혈관의 압력이 높아 혈관 주변에 마치 거미줄처럼 핏줄(해면상 혈관종)이 심하게 엉켜있었다. 또한 딱딱하게 굳어진 간 일부가 우리 몸의 가장 큰 하대정맥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간을 떼어내다가 자칫 다른 장기에 혈액순환이 정체되어 소장, 신장, 췌장 등 다른 장기가 붓게 될 위험이 컸다.

이러한 위험을 예방하고자 이승규 석좌교수는 일차적으로 혈관 분리 작업을 마친 다음 피가 안전하게 돌아 흐를 수 있도록 인공 길을 만들어주는 우회술을 시행했다. 이후 문덕복 교수가 굵은 혈관에서 간을 안전하게 떼어냈고 건강한 혈관을 찾아 새로운 간의 혈관과 무사히 이어 붙였다. 아침에 시작된 수술은 17시간이 지나 성공적으로 끝났다.

딸 킴벌리 씨는 수술 후 8일째 되는 날 퇴원했으며, 마르코 씨도 순조롭게 회복해 수술 후 3주 차에 건강히 병원 밖을 나섰다. 부녀는 출국 전 남은 검사와 외래까지 마무리한 후 29일(목)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승규 서울아산병원 간이식·간담도외과 석좌교수는 “최근 모로코에서도 두 형제가 간암 아버지를 모시고 머나먼 한국까지 찾아와 아버지의 건강을 되찾아주었는데, 이번엔 페루 출신 미국인 부녀가 한국의 간이식으로 고귀한 생명을 얻었다. 서울아산병원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체절명의 말기간부전 및 간암 환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는 병원이 되었다는 데 큰 책임감을 느낀다. 앞으로도 국내는 물론 전 세계 환자들이 서울아산병원에서 건강을 되찾고 새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모든 간이식팀 의료진이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문덕복 서울아산병원 간이식·간담도외과 교수는 “환자의 굳어진 간이 대정맥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 수술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문맥 고혈압 악화와 대정맥 박리 도중 혈관 손상으로 대량 출혈 및 공기색전증이 발생할 위험이 컸다. 다행히 문맥-대정맥 우회로를 미리 만들어 두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한 덕분에 어려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환자가 힘든 수술을 받고도 합병증 없이 잘 회복된 만큼 고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건강을 오래 유지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마르코 씨는 “올해 초 폐까지 물이 차면서 숨쉬기가 힘들어졌을 때는 내 몸이 좋아질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한국까지 날아왔고 난생처음 밟아보는 낯선 땅 한국에서 기적처럼 생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국 페루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앞으로 계속 봉사할 기회를 얻게 돼서 무척 행복하다. 한국에서 얻은 새 생명으로 조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더 힘껏 도우며 살아가겠다”고 밝혔다.

[사진] 마르코 씨와 딸 킴벌리 씨가 귀국을 앞두고 21일(수) 서울아산병원 신관 옥외정원에서 간이식·간담도외과 의료진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기증자인 딸 킴벌리 씨, 수혜자 마르코 씨, 뒷줄 왼쪽부터 송기원·문덕복 교수, 이승규 석좌교수.
[사진] 마르코 씨와 딸 킴벌리 씨가 귀국을 앞두고 21일(수) 서울아산병원 신관 옥외정원에서 간이식·간담도외과 의료진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기증자인 딸 킴벌리 씨, 수혜자 마르코 씨, 뒷줄 왼쪽부터 송기원·문덕복 교수, 이승규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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