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안암병원, 청진기도 이제 ‘데이터’다.

장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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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인·이은주 교수팀, 디지털 청진기, 호흡기질환 관리의 새 가능성 제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며 폐렴, 만성폐쇄성폐질환, 기관지 천식, 간질성 폐질환 등 호흡기 만성질환 관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 질환들은 초기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증상이 악화와 호전을 반복해 진단과 지속적인 관리에 어려움이 따른다. 이에 호흡기 상태를 보다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병원 밖에서도 환자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디지털 기반 진료 기술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 : 최수인, 이은주 교수(왼쪽부터)
사진 : 최수인, 이은주 교수(왼쪽부터)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호흡기·알레르기내과 최수인, 이은주 교수팀은 최근 디지털 청진기를 활용한 임상 연구를 통해 호흡음 데이터 수집과 시각화의 임상적 가치를 입증했다. 이번 연구는 기존 아날로그 청진의 한계를 보완하고, 디지털 데이터 기반 호흡기질환 관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의 첫 번째 성과로 아날로그 청진기의 주관적 판단 영역을 디지털 데이터로 객관화할 수 있음을 확인한 점을 꼽았다. 디지털 청진기는 미세 전자기계 시스템(Micro Electro-Mechanical System, MEMS)기술을 활용해 호흡음을 녹음하고 저장한다. MEMS는 작은 기계 장치와 전자회로를 하나로 만든 기술로 20Hz~4,000Hz 대역 주파수의 호흡음을 음원 손실이나 왜곡 없이 녹음하며, 몸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꿔 기록하는 데 활용된다. 이를 통해 천명음과 수포음 등 임상적으로 중요한 호흡음을 디지털 파일로 확보한다.

천명음은 기도가 좁아졌을 때 들리는 ‘쌕쌕’거리는 소리이며, 수포음은 폐 안에서 공기와 분비물이 섞이거나 작은 기도가 열릴 때 들리는 ‘딱딱’ 또는 ‘바스락’ 같은 소리다. 이 같은 호흡음은 천식, 만성폐쇄성폐질환, 폐렴, 간질성 폐질환 등 다양한 호흡기질환의 진단과 경과 관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연구팀은 녹음·저장한 호흡음을 소리의 높낮이와 세기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방식인 멜 스펙트로그램으로 변환해 의료진이 귀로 듣고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정상 폐음, 천명음, 수포음, 감소된 폐음이 서로 다른 시각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으며, 이른바 ‘보이는 청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번 연구는 정상 폐, 안정·악화 상태의 천식, 안정·악화 상태의 만성폐쇄성폐질환, 폐렴, 간질성 폐질환, 흉수 등 다양한 상태의 참가자 64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연구팀은 기존 아날로그 청진과 디지털 청진으로 얻은 폐음을 비교 분석했으며, 디지털 기기로 녹음된 폐음이 기존 청진 결과와 높은 일치도를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천식과 만성폐쇄성폐질환의 악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천명음은 디지털 청진기의 판독에서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 이는 디지털 청진이 만성 호흡기질환의 상태 변화 확인과 지속 관리에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디지털 청진기가 기존 아날로그 방식을 보완하거나 일부 상황에서는 대체할 수 있는 임상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연구 결과, 디지털 청진기로 녹음한 폐음 판독 결과는 기존 청진 결과와 높은 일치도를 보였다. 세 명의 평가자가 디지털 폐음을 판독한 결과, 기존 청진 결과와의 일치도 지표는 0.8 이상으로 디지털 청진으로 얻은 폐음이 기존 청진과 비교해 임상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수준임이 확인됐다.

최수인 교수는 “이번 연구는 COVID-19와 같은 심각한 감염성 질환의 대유행이나 엄격한 격리 진료 상황에서 의료진의 직접 접촉을 줄이면서도 환자의 호흡기 상태를 보다 정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디지털 청진은 의료진 보호와 의료 자원 절감 측면에서도 진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실질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저장된 고품질 호흡음 데이터는 의료진 간 공유와 협진에도 활용될 수 있다. 여러 의료진이 동일한 호흡음을 함께 듣고 확인할 수 있어 신속한 협력이 가능하며, 수련의와 학생들이 실제 폐음을 반복해서 듣고 시각 자료와 함께 학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 가치도 기대된다.

이번 연구의 또 다른 성과는 환자가 병원을 벗어난 일상에서도 안전하게 관리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만성폐쇄성폐질환이나 기관지 천식 환자가 가정에서 스스로 측정한 호흡음 데이터를 병원으로 전송하면, 의료진은 환자의 상태 악화를 조기에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불필요한 응급실 방문이나 입원을 줄이고, 환자 중심의 자가 관리 체계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임상시험에 참여한 환자들의 사용 만족도도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청진기를 이용한 진찰에 대해 참가자의 79.69%는 기존 청진기와 비슷하게 편안하다고 답했으며, 20.31%는 더 편안하다고 답했다. 연구팀은 디지털 청진으로 수집된 고품질 호흡음 데이터가 향후 인공지능이 질환을 자동으로 판별하는 AI 선별 엔진 개발의 중요한 기반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은주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청진기는 이제 단순한 청취 도구를 넘어, 진단을 위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정밀 의료 장치로 진화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며 “이번 성과가 고령 인구의 호흡기질환 관리 문제를 해결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데이터 기반 스마트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 ‘Usefulness of lung sound data collection using Skeeper SM-300® device: A pilot study’는 국제학술지 PLOS One에 게재되었으며, 전통적인 아날로그 청진의 한계를 넘어 디지털 데이터 기반 호흡기 질환의 관리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학계에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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